219일이다. 지난주까지 3차례 구로구 탐방했다. 근현대의 산업화를 체험했다. 이번 주는 켜켜이 쌓인 역사의 한 꺼풀 아래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제일 먼저 간 곳은 평강성서유물박물관이다. 참 오랜만의 박물관 나들이다. 전 세계 202개국에는 55,000여 개의 박물관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900여 개의 박물관이 있다. 이들 박물관은 다양한 주제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성서박물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성서박물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제1전시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제1전시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제2전시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제2전시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평강성서박물관 박윤식 목사 기증된 4,000여 점의 유물 전시
한반도 약 4만기 고인돌, 기원전 1000년부터 시작된 청동기 무덤

늘의 주제는 성서. ‘평강성서유물박물관은 오류동 평강제일교회 옆에 있다. 미국의 성서고고 학자 케네스 바인 박사가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목사에게 기증한 4,0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성서박물관이라고 성경과 관련된 유물만을 전시한다고 생각하면 큰 착오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책이다. 곧 이스라엘의 세밀한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이다.

# 이스라엘의 역사 품은 성서박물관

박물관에 도착했다. 아뿔싸. 사전 예약 없이 입장할 수 없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국내에서 하는 이스라엘 역사 여행을 포기할 수 없다. 인터폰을 눌렀다. 사정을 설명했다. 입장이 허락됐다. 필자가 이날 첫 관람객인 모양이다. 전시 준비하는 동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제1전시관 유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제1전시관 유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3층 전시실로 올라갔다. 계단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신명기 327절 내용이다. 전시관을 만든 이유인 듯했다. 3층 전시실 입구는 커룹으로 장식되어 있다. 커룹은 하나님이 타고 다닌 말(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말의 몸을 한 상상의 동물)이다. 생경하다. 마치 고대 오리엔트 문명을 만난 듯한 느낌이다.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의 오리엔트 문명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문명이 성경의 뿌리다.

1 전시관의 주제는 하나님의 창조. ‘태초의 유물을 볼 수 있다. 주로 팔레스타인과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발굴된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토기(사발, 물병, 항아리, 등잔)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등잔에 눈길이 갔다. 이 시대에 등잔은 성물로서 역할이 컸다. 즉 신을 위한 의식에 사용됐다는 얘기다. 전시실 한쪽 벽에는 양각 나발이 매달려 있다. 양각 나발은 숫양의 뿔로 나든 나발로 지휘 및 통신용 신호로 사용됐다.

2전시실은 인간의 타락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가치를 중시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물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유리 벽 안에 박제로 살아가는 미라와 미라 가면, 그리고 아누비스(미라를 방부 처리하는 미라 제작자), 샤브티(부장된 노동자 인형), 하쳅수트의 황금 완장, 청동검……. 유물마다 간직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제2전시관 유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제2전시관 유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 제1전시관, ‘하나님 창조’, 2전시관 인간의 타락

하지만 한결같이 냄새가 난다. 인간적 냄새다. 영원의 삶과 아름다움의 추구 그리고 정복을 꿈꾸는 인간의 모습이다. 5000년 세월을 반추하게 한다. 타락한 오늘날의 인간을 본다.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지고 있다. 종교전쟁은 씨를 말리는 싸움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의 성서적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이 타락해 가던 그 순간, 예수가 나타난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다. 신약성경은 예수의 일생기다. 3의 전시실이 다루고 있는 게 성경이다. 양피지 두루마리 성경, 쐐기문자 점토판, 파피루스 문서 등을 볼 수 있다. ‘평강성서유물박물관이 자랑하는 신 제네바 성경도 있다. 이 유물은 종교개혁 직후 만들어진 최초의 영어 성경인 제네바 성경450년 만에 복원한 것이다. 눈으로 확인하는 예수가 따로 없다. 약탈의 현장, 루브르박물관이나 대영제국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을 서울 오류동에서 볼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러울 뿐이다.

# 루브르.대영제국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유물

고척동 고인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고척동 고인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같은 시대의 한반도의 모습은 어떨까. 그 흔적을 찾아간다. 오류중학교 뒤 능골산 자락에 있는 고인돌이 그것이다. 일명 고척동 고인돌이다. 어르신 두 분이 비를 피해 정자에 앉아있다. 고인돌의 위치를 물었다. 길을 따라 가면 나오는 계단으로 가라고 일러줬다. 계단 앞에 구로올레길안내도가 있다. 안내도엔 고인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정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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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이나 올랐을까. 회색 펜스가 나왔다. 그 속에는 땅에 묻힌 넓적한 돌이 하나 누워 있다. 고인돌 덮개돌이었다. 그 크기(화강편마암·1.90×1.05×0.28m)도 왜소하기 짝이 없다. 상상했던 게 아니다. 강화도 고인돌공원에서 봤던 것도 아니다. 대지를 지탱하는 굄돌 위에 올라앉은 거대한 고인돌이 아니었다. 마침 한 중년 남성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고척동 고인돌이 맞냐고 물었다. 그렇단다.

전 세계에 남아있는 고인돌 절반이 한반도에 있다. 4만기 정도 된다. 고인돌은 기원전 1000년부터 시작되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다. 인구집중과 권력관계를 상징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강화고창화순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고척동 고인돌도 사료적 가치가 높다. 비록 반쯤 땅에 묻혀 있다고 하더라도. 서울에 있던 수많은 고인돌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지석묘다. 거기다가 성혈(고인돌에 새겨진 기하학적 무늬)’도 또렷하다.

그런데 고척동 고인돌이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고인돌의 덮개돌이 옮겨진 흔적이 있고 훼손됐다는 게 그 이유란다. 묻고 싶다. 자리를 옮겨서 보존하는 수많은 유물, 훼손 부분을 복원한 유물은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인가.

고척동 고인돌이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는 이유

여계 묘역. 사진=구로구청 홈페이지
여계 묘역. 사진=구로구청 홈페이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능골산을 따라 한참을 돌면 계남근린공원이 나온다. 공원에 들어서자 정면에 태극 문양이 그려진 솟을대문이 있다. 여계 묘역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숭의랑공 여계는 함양 여씨다. 조선 태종 때 호조좌랑을 지냈다. 좌랑은 정6품이다. 최고위직 관리라고는 할 수 없다.

여계의 묘가 주목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조선 초기의 묘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부인 청송 심씨의 묘가 여계 앞에 있다. 흔하지 않은 묘의 배치다. 부인(여성)을 우대하는 조선 초기의 관습이 여계의 묘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어떻든 유교 국가에서 이런 묘제를 행했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는다.

아쉽지만 여계 묘역을 다 둘러보지 못한 채 또 다른 묘역으로 자리를 옮긴다. 정선옹주 묘역이다. 정선옹주(조선 선조의 7)의 묘역은 궁동생태공원에 붙어 있다. ‘궁동이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 ‘궁동은 원래 이름은 궁골이다. 안동 권가 가문으로 출가한 정선옹주가 터를 잡을 곳이 바로 궁골이었다. 이 마을에 정선옹주 궁이 있었다.

정선옹주묘역.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선옹주묘역.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선옹주 부부의 합장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선옹주 부부의 합장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선옹주 궁은 하늘에서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옥(天屋)’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궁이 있던 마을은 전형적인 금계포란(황금닭이 알을 품은 형상)의 길지라는 뜻이다. 하지만 정선옹주의 흔적은 6·25 한국전쟁 때 사라졌다. 불타 없어졌다.

# 정선옹주의 묘역과 부군 권대임의 신도비

묘역에서 탐방객을 맞은 건은 신도비였다. 정선옹주 부군인 권대임의 신도비이다. 이 묘역의 공식 명칭도 충정공 권협 공 묘역이다. 그렇다 권협이 이곳에 터를 잡은 후 400년을 이어 왔으니 묘역 명칭 역시 권 씨에게로 돌아가는 게 맞을 듯하다.
 

권협 신도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권협 신도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권대임의 신도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권대임의 신도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신도비를 돌아가자 묘역이 드러났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거대한 묘역이다. 능골산 자락을 따라 층층이 10여 개의 무덤이 있다. 권협을 비롯하여 정선옹주의 남편인 권대임 등이 있다. 죽은 뒤에도 권 씨들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맨 위의 무덤은 권협의 묘였다. 그 밑에 정선옹주 부부의 합장묘가 있었다. 무덤에 내리는 차가운 빗방울 때문인지 무덤의 때가 쓰러져 누워 있다. 묘역을 내려오는 길에 또 다른 신도비를 만났다. 충정공 권협의 신도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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