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동신시가지아파트(이하 목동아파트)로 간다. 목동 아파트는 한국의 도시 개발과 관련한 다양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 도시 개발 계획의 압축판이자 이정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많은 실험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성취도 있었다. 물론 적지 않은 오류도 남겼다.

목동아파트 전경. 자료사진
목동아파트 전경. 자료사진
표지석. 자료사진
표지석. 자료사진

도시 개발 계획의 압축판이자 이정표 상징성
- 전두환 정권, 500만 호 건설 목표 무산시킨 목동아파트

17일 일요일 오후다. 날씨는 포근했다. 지하철 5호선 목동역에서 내렸다. 홍익병원 별관을 끼고 넓은 도로가 나왔다. 달리는 말 위에서 곡예 하는 목동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간판이 매달려 있다. 목동 로데오거리다. 레노마, 볼릭, 디페리옴므, 르꼬끄 스포르티브, HK테일러, STCO 등 유명 상설매장이 양쪽 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다. 줄잡아 140여 개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고 한다.

목동 패션거리, 서울 서남권 패션 메카 무색한산

하지만 목동 패션문화거리는 명성과 달랐다. 한산했다. 아니 썰렁했다. 목동의 대표적 상권이라는 말이 무색했다. 서울 서남권의 대표적인 패션 메카라는 명성은 어디로 간 것일까. 특화 거리의 행인이 매장보다 적었다. 길을 따라 걷는데 어디선가 날카롭고 다급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요!, 여기요! 여기요!”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목소리의 행방을 못 찾겠다. 필자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혹시 구조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아닐까. 한참을 로데오거리에 서 있었다. 더 이상의 기척이 없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혹시 죽어가는 상권이 내는 시름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데오 거리1.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로데오 거리1.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불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목동사거리로 향했다. 목동역에서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 난다. 인파가 넘쳐났다. 목동 상권 중 유일하게 유흥문화가 발달한 상권이다. 목동은 이곳을 제외하고 숙박시설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전형적인 주택가 상권이다. ‘주거 환경'이 뛰어난 명품 아파트로 주목받는 이유이다. 이렇게 된 데는 기존의 아파트 단지와 전혀 다른 개념으로 디자인됐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근린주구(近隣住區·Neighborhood Unit) 개념이다. 이는 주민 생활의 안전성, 편리성, 쾌적성을 확보하고 거주자의 생활권을 보호한다는 개념이다.

근린주구 안전.편리.쾌적 확보 생활권 표명

사실 목동아파트가 이처럼 훌륭한 주거단지가 되기까지 수많은 사연이 있다. 목동아파트 건설은 전두환 전 정권에서 시작됐다.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정권 정당성을 얻기 위한 퍼포먼스가 필요했다. 눈에 보이는 퍼포먼스가 가장 효과적이다. 높은 건물만큼 뚜렷이 드러나는 업적은 없다.

특히 당시 서울은 극심한 주택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500만 호 건설을 추진했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당시 이 나라에 존재하는 주택의 총량이 500만 호 정도였다라면서 그와 맞먹는 양을 10년간에 건설하겠다는 발표를 놓고 믿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었지만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 내용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얼마나 무모한 계획이면 이렇게 말했을까.

500만 호 건설의 첫 실험이 목동아파트다. 당시 목동은 진펄이었다. 홍수 때마다 수해를 입었다. 그 지역에는 여의도, 회현동 개발과 함께 쫓겨난 집단 철거민의 판자촌과 구로동 노동자의 쪽방촌이 어우러져 있던 곳이다. 거무튀튀한 안양천, 누더기 같은 판자촌, 쓰러져가는 초가집···. 김포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당시 목동의 풍경이다.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전 정권의 해결할 문제였다. 19834월 목동과 신정동 일대 아파트 건설 계획이 발표됐다. 서민에게 임대아파트를 지어준다는 명목이었다. 토지 수용부터 분양까지 정부가 주도했다. 최초의 공영개발이었다.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개발사업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4개 단지 392동에 26,639가구의 입주가 마무리됐다.

올림픽전 14개단지 26639가구 강행 군부정권
 

단지내 산책로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단지내 산책로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산책로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산책로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하지만 목동 거주민의 내 집 마련의 꿈은 산산이 조각났다. 철거민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임대아파트 계획이 취소된 것이다. 중대형 위주로 평형 조정이 이뤄졌다. 공사비 마련을 위한 조치였다. 정부는 이주민에게 이주비 50만 원을 지급했다. 그리고 하나 마나 한 입주권을 약속했다. 현지 주민은 갈 곳을 잃었다. 그들의 소득으로 입주가 불가능했다. 80형의 분양가가 2,000만 원이었다. 당시 대졸 초임이 20만 원 정도였다. 임대아파트 약속 준수를 요구하는 현지 주민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

생존권 투쟁에 나섰다. 시위대는 무자비하게 진압됐다. 투쟁은 3년이나 이어졌다. 현지 주민은 정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다. 하지만 전혀 소득 없는 투쟁은 아니었다. 정부로부터 최초로 무허가건물에 대한 재산권을 인정받았다. 인간의 주거권에 대한 정부의 첫 조치였기 때문이다. 끝까지 투쟁한 주민 105가구는 경기도 시흥시에 이주할 땅을 얻었다. 거기에 목화연립이 들어섰다. ‘목동 철거민이 어울려 화목하게 살자는 뜻으로 이 같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런 투쟁에 중심에는 빈민 운동가 제정구 전 의원이 있었다. 목동 철거민의 투쟁은 헛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의 노력 덕택에 전두환 정권의 ‘500만 호 건설 계획은 중단됐다. 전두환 정권에서 목동 개발 이후 대단위 도시 개발은 없었다.

35년 넘은 목동apt 7단지...공원 아파트

목동사거리 한 편에는 목동아파트 7단지가 있다.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35년이 넘는 노령 아파트 같지 않다. 아름드리나무가 많다. 하기야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지 수십 년이 지났으니 이상할 게 없다. 어떻든 봄기운이 짙어지면, 야외의 풍경에는 비할 수 없더라도 봄의 정취를 맛보기에 부족하지 않을 듯하다. ‘공원 위에 지어진 아파트라는 말이 실감 난다. 새삼스럽지만 목동아파트를 설계한 건축가, 김수근, 강병기, 김종성 등의 통찰과 혜안에 찬사를 보낸다. 그들은 목동 아파트 단지 건설할 때 파리를 모델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목동 학원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목동 학원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7단지에서 길을 건너면 4, 3, 2, 1단지로 이어진다. 단지를 지나다 보면 단지 밖은 연립주택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지역이 상업업무 지역 역할을 하고 있다. 1, 2단지 주변에는 형성된 학원가도 그런 맥락처럼 보였다. 차도와 보행로가 상업업무 시설과 주거지구를 분리하고 있는 듯했다. 또 단지 내부도 저층과 고층의 주거 동이 혼재해 있다.

또 단지마다 정해진 테마의 색깔을 갖고 있다. 1~4단지는 흰색 기본색깔로 하고 있다는 듯했다. 거기에 단지 별로 약간의 변화를 준 색채디자인이 이뤄졌다. 삭막한 아파트 단지 투어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다. 또 그런 색깔과 무늬에 어울리는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단지마다 은행나무, 느티나무, 감나무, 목련, 벚나무, 메타세쿼이아 같은 상징나무가 따로 있다는 얘기다. 이는 철저한 계획에 따라 이뤄진 설계임을 반증하는 듯했다.

오목교역 체비지...대규모 주상복합단지 조성

오목교역 주변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오목교역 주변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목동 단지를 돌면서 든 생각이 있다. 30년 전에 지어진 아파트 단지인데도 필자가 사는 신축아파트 단지와 비교해도 손색없다는 것이었다.

아파트를 지난 오목교역 주변에 도착했다. 사실 이곳은 가장 늦게 개발된 곳이다. 체비지였다. 토지구획정리 사업을 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마련된 땅이다. 2000년대 대규모 주상복합 단지와 방송사 등 업무 시설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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