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에서는 감각적 충동(衝動)과 무절제가 합리적 이성(理性)을 밀어내고 이기적 개인주의가 국가적 공동체의식을 파괴한다. 기회주의가 원칙을 비웃고 괴담과 거짓말이 정론사회를 뒤흔든다. 민주주의는 “폭민중우정치(暴民衆愚政治:Mobocracy)”로 퇴화됐으며 폭력이 법을 다스린다. 앞뒤 생각 않고 막가는 선동가가 국민적 영웅으로 박수를 받는다.

국회의원들은 국가의 장래야 어떻게 되 든 당리당략과 개인적 인기를 위해 반국가적 독설을 마구 토해낸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제2의 을사늑약” “폭탄이 있었다면 국회를 폭파하고 싶다” 등 반(反)의회민주적이며 반국가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집권여당은 야당의 거센 반발이 두려워 최루탄 테러 의원에 대한 징계도 요구하지 못 한다. 비굴하다.

네티즌들은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근거 없는 악성 괴담과 거짓말을 버젓이 띄워 혹세무민 한다. FTA가 시행되면 “미국 쇠고기 수입으로 인간 광우병 생긴다” “미국의 경제식민지로 전락된다” 등 괴담을 거리낌 없이 뿜어댄다. 

일부 국민들은 국회에 최루탄을 터트린 테러, “을사늑약”이라는 망언, 섬뜩한 괴담 등을 자행한 사람들을 영웅처럼 떠받든다. 근거 없고 무책임한 말을 절제 없이 뱉어내는 연예인들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닌다. 불법 시위대는 경찰서장을 두들겨 패고 취객은 파출소에 들어가 기물을 부수며 경찰을 폭행한다. 조폭이 지배하는 뒷골목의 무법천지 같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이 지적한 대로 ‘폭민중우정치’로 전락된 느낌을 금할 수 없게 한다.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폭도와 어리석은 군중이 지배한다는 지적이었다.

역사학의 창시자 투키디데스는 ‘펠로포네스 전쟁사’에서 아테네 말기의 국민의식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는 ‘분별없는 만용이 충성스런 용기처럼 간주됐고 비겁한 자는 심사숙고한다고 둘러댔다. 중용(中庸:어느 쪽으로도 치우침 없는 중도)은 사나이 답지 않은 약자의 도피처였고, 모든 것을 안다는 자는 기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였다…파당적 결속이 국민적 결속보다 더 강했다’고 탄식했다. 지금의 대한민국 실상을 말한 것 같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무역 1조 달러 달성을 자랑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아테네 말기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당에 최루탄을 던진 ‘분별없는 만용’은 ‘충성스런 용기’처럼 찬양되고 당리당략만을 쫓는 ‘파당적 결속’이 ‘국민적 (공동체) 결속’보다 강하다. ‘모든 것을 안다는’ 폴리페서(정치교수), 폴리저쥐(정치판사), 폴리테이너(정치연예인)는 ‘기실 아무것도 알 지 못하는 자’이거나 지적 균형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는 필시 까닭이 있다.

먼저 정치 불신, 1%대 99%의 불균형, 이념적 지역적 갈등, 세대간 차이, 경제 불황, 정부의 엄격한 법집행 의지 결여 등을 꼽을 수 있다.

다음으로는 민주주의가 타락해 웰빙과 방종으로 빠져들었고 충동이 이성을 지배하며 폭민중우정치로 퇴락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밖에 인터넷 등 전자매체에 젖어 논리적 사유보다는 찰나적인 감성에 빠진 젊은 세대의 충동적 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1960년대 캐나다의 언어학자 마셜 맥루한은 인쇄매체의 기성세대는 유추적(類推的)이고 사려 깊은데 반해, 전자매체 세대는 감각적이며 충동적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우리 국민들은 충동과 무절제의 미궁에서 벗어나야 한다. 충동과 무절제로 병든 국민의식은 외부의 적 보다 무서운 내부의 적이다. 이 내부의 적을 다스리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폭민중의정치를 벗어날 수 없고 존경받는 선진국으로 승화할 수 없다. 앞이 캄캄할 따름이다.

■ 본면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