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손기식(55·사법연수원장)·정호영(서울고등법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열었다. 전체 선관위원 9명 중 대법원장이 추천하는 3명에 대해 인사청문회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청문회에서는 손 내정자의 능력과 도덕성, 정치적 중립성 등을 검증하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손 내정자는 그동안 ‘금배지’들에게 ‘저승사자’로 불릴 정도로 정치사건과 관련한 형평성 논란에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특히 손 내정자는 지난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인 권인숙씨 재정신청을 기각한 담당판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적잖은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선관위원은 고도의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한다는 점에 비춰볼 때 손 내정자의 과거 이력과 관련한 구설수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우리법연구회 논문집(II)에 실린 ‘1993년 사법민주화운동 회고’라는 글에서 김종훈 변호사는 5·16 직후 국보위에 파견됐던 판사와 5, 6공화국 시절 청와대에 파견 나갔던 판사들이 승진과 보직에서 혜택을 받으며 ‘정치판사화’됐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사법부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권인숙 사건’ 판결 반발사

‘정치판결’ 논란은 이미 지난 93년 10월4일 대법원이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서 제기된 바 있다. 이 자료에는 5, 6공화국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국사건의 재판을 담당했거나 청와대 국보위 등에 파견됐던 현직 판사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이른바 ‘정치판결’사건들과 관련된 판사들의 명단이 공개된 것이다.자료에 따르면 당시 민주당 강수림 의원 등이 정치판결로 지목한 주요사건은 민청학련사건(74년)을 비롯, 김대중내란음모사건(80년), 유성환 의원 국시논쟁사건(86년), 권인숙씨 성고문사건 재정신청 기각(86년), 이창석씨 보석허가사건(90년), 강기훈씨 ‘유서대필’ 공방사건(91년), 14대 총선때 안기부 흑색선전물살포사건(92년) 등 총 16건이다.

문제는 공권력의 추악한 타락성을 드러낸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씨 재정신청 기각 사건을 담당한 판사가 바로 손 내정자였다는 사실이다.86년 8월25일 대한변협은 문귀동씨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항의해 166명의 변호사로 재정신청 대리인단을 구성, 법원에 재정신청을 냈다. 그러나 손 내정자의 재판부는 10월 31일 문씨 기소유예처분에 대한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문씨가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당시 재판부는 “문 경장이 뒤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고 있으며 비등한 여론과 피의 사실로 인해 형벌 못지않은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을 짐작해 기소유예처분한 것은 그 상당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문제는 기각 결정문 자체가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재판부는 고발장에 나타난 대부분의 범죄내용을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문씨가 성고문을 했다는 권씨의 진술은 목격자가 없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모호한 의견을 밝혔다. 증인이 없으므로 문씨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가 정당하다는 판결은 당시 재판부의 독립성에 대한 의문과 동시에 많은 사회적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대법원은 88년 2월 재정신청을 받아들였고, 문귀동은 89년 6월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건 발생 3년만이었다.당시 이 사건은 군사정권의 부도덕성 및 인권유린의 실상을 고발하는 한편,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검·경찰, 사법부를 좌지우지하는 공안당국, 권력에 빌붙은 언론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기자는 ‘정치판결’ 논란과 관련해 손 내정자의 해명을 직접 듣고 싶었으나 그는 바쁜 일정을 이유로 통화를 거부했다. 손 내정자의 비서인 A씨는 24일 오후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원장님은 너무 바빠서 통화가 곤란하다.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 통화가 가능할지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A씨는 또 93년 당시 국감자료에 나와 있는 해당 내용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기자가 권인숙씨 재정신청 사건과 관련해 손 내정자의 정치판결 논란을 언급하자 A씨는 “처음 듣는 말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며 “너무 오래 전 사건이라 손 내정자도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법원과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실추시킨 이 사건과 관련, 불의한 권력에 부합하는 듯한 판결을 내린 사법부의 중심에 손 내정자가 자리했다는 것은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사법부의 중심인물이 국가 권력기관과 유착했다는 ‘정치판결’ 의혹은 정치적 중립성이 철저하게 요구되는 선관위원에 내정된 손 내정자의 행보에 적잖은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인사청문회서 집중포화

손 내정자가 판결한 각종 정치사건과 관련한 형평성 논란도 끊이질 않고 있다. 그동안 손 내정자는 2002년 대선이나 지난해 총선과정에서 발생했던 크고 작은 정치사건들을 도맡아온 터라 그의 판결은 여야 의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손 내정자가 동일한 잣대가 아닌 편파적으로 판결했다는 의혹을 정치권이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손 내정자가 내린 판결의 편파성을 두고 치열한 갑론을박을 펼쳐왔다. 특히 선거법 위반과 관련한 판결들은 상대적으로 한나라당에 관대하게 내려졌다는게 여권의 주장이다.

이번 청문회에서도 손 내정자는 그동안 담당한 사건의 ‘편파 판결’ 여부와 관련해 여당 의원들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여기에는 손 내정자가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재직할 당시 여당 의원들에게 잇달아 의원직을 상실케 하는 판결을 내려 ‘과반의석’을 붕괴시킨 장본인이라는 감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관측된다.하지만 손 내정자는 그동안 같은 혐의로 기소된 의원들에 대해 사뭇 다른 판결을 내려 형평성 논란에 자유롭지 못했던게 사실이다. 2004년 8월17일 손 내정자는 지난 대선당시 ‘노무현 후보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동아건설 보물선 사건과 관련돼 주가조작을 부추겨 소액투자자들에게 손해를 끼쳤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이규택 한나라당 의원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벌금 250만원의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이 의원의 행동이 검찰수사를 촉구하는 차원이었고, 그것이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정치권에서 고소고발을 일괄 철회했는데 이 의원만 홀로 기소된 점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단지 ‘선거결과에 영향이 없었다’는 이유로 ‘선고유예’라는 가벼운 형량을 선고한 손 내정자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특히 이규택 의원에 대한 판결은 비슷한 죄목으로 기소된 열린우리당 이철우 전의원에 대한 판결과 비교돼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총선 선거유세에서 ‘한나라당 고조흥 후보가 20,30대는 투표하지 말고 놀러가도 된다고 말했다’는 내용의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이 전의원은 항소심에서도 원심대로 벌금 250만원을 선고받았다. 당시 피고인의 유세장면을 지켜본 증인들의 의견이 모두 일관됐다는 것이 재판부가 밝힌 이유였다. 또 손 내정자는 2004년 11월30일 ‘이회창 전한나라당 총재 20만불 수수 의혹’을 제기해 불구속기소된 민주당 설훈 전 의원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해 또 한번 형평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명예훼손은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벌금형 이상의 처벌이 따라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 역시 이규택 의원 판결때 적용한 논리와 맞지 않는 ‘이중잣대’라는 지적을 받았다. 선거법 관련 판결에서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된다는 지적에 대해 손 내정자측은 “법적 논리에 따른 판결일 뿐 정치적 의도는 없다”고 항변하고 있다. 내년 5월 지방선거와 2007년 대선을 앞둔 지금은 어느 특정 정파나 정치세력에 치우치지 않는 선관위의 공정성과 중립성 확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손 내정자가 ‘정치판결’과 ‘편파판결’ 구설수에서 탈피해 정치적 중립을 지켜나갈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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