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 프레임에 갇힌 19대 국회, 현안은 ‘뒷전’

▲ 법정 국회 개원일인 지난 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이른바 종북의원들의 국회출입을 반대하는 1인 시위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사진=정대웅 기자>

[일요서울ㅣ정찬대 기자] 이명박 정권의 여러 행태를 보면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과 상당부분 닮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문민정부 이후 더 이상 논란의 가치가 없어진 줄 알았던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은 현 정부 들어 ‘과거 회귀’ ‘민주주의 후퇴’라는 단어를 낳으며 국민적 비판의 대상이 됐으며, 여기에 대선을 6개월여 앞둔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케케묵은 ‘이념 논쟁’을 보면서 2012년 대한민국 모습에 의구심을 갖다가도 분단국가라는 엄연한 현실 앞에 절로 한 숨 짓게 만든다.

대한민국 정치는 현재 ‘종북’이라는 이슈에 갇혀있다. 여권의 유력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의 ‘사상 검증’ 발언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이념 논쟁에 불을 지핌으로써 대선을 앞두고 종북 논란은 더욱 격화되는 양상이다. 민주통합당은 ‘신(新) 공안정국’을 형성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정면 돌파를 하면 할수록 색깔 논쟁은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정부여당을 비롯한 보수 진영은 ‘종북주의’와 ‘색깔론’을 들고 나와 야권을 향해 연일 공세를 펴고 있다. 종북이라는 정치적 이슈를 선점함으로써 정국 주도권은 물론 대선을 좀 더 유리한 국면으로 끌고 가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에 대항하는 민주통합당의 역공도 만만치 않다. 여권의 공세를 ‘악질적인 매카시즘’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한데 이어 ‘유신의 딸’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의 국가관을 언급하며 맞불을 놓고 있다.

분열됐던 여-야 진영은 이념 논쟁을 계기로 단일 대오하는 모습이다. 새누리당은 친이(친이명박)와 친박(친박근혜)이 야권 때리기에 손을 맞잡았으며, 민주통합당의 친노(친노무현)와 비노(비노무현) 역시 여권의 공세에 적극 대응하며 한 목소리로 규탄하고 있다.

새누리 “사상검증 필요” vs 민주 “신공안정국 유도”


통합진보당 사태로 불거진 종북논란은 민주통합당 임수경 의원이 지난 1일 탈북자 대학생 백요셉 씨와 가진 술자리에서 탈북자 비하 발언은 물론 한때 학생운동을 함께한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에 대해 ‘변절자’라고 비난하면서 그 불똥이 민주당으로까지 튀게 됐다.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는 “정치권에서는 종북이나, 간첩 출신까지도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나서는 마당”이라고 토로했으며, 정우택 최고위원은 임수경 의원의 국가관을 언급하며 “민주통합당은 어떤 과정을 거쳐 임 의원을 비례대표로 선정하게 됐는지 밝혀야 한다”고 공세를 가했다.

친이계 심재철 최고위원은 “색깔론 논란으로 종북을 덮을 순 없다. 새누리당의 종북 비판을 색깔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역 색깔론이고, 역 매카시즘”이라고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으며, 이밖에도 친박계 핵심인 윤상현 의원은 “종북의 몸통은 민주통합당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민주당이 그토록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에 연연했는지 이유를 알겠다”고 이념적 공세를 이어갔다.

김영우 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일부 종북 세력들이 국회에 들어와 활동하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며 “종북 주사파 의원에 대한 자격심사와 제명만이 호국영령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목청을 높였다.

반면, 민주통합당 이해찬 신임대표는 지난 4일 새누리당의 북한인권법 국회상정을 “내정간섭이자 외교적 결례”라고 직격탄을 날린데 이어 6일 국회 기자회견에서는 “매카시적 광풍으로 대선을 치르겠다면 이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 행위”라며 새누리당의 이념 공세에 강한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이 대표는 한발 나아가 “헌정 질서를 유린한 5·16 박정희 군사 쿠데타에 대해 박근혜 전 위원장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느냐”며 역공을 펴기도 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지난 7일 의원총회를 소집한 자리에서 “현재 박정희, 전두환 시대로 회귀된 것 같다”며 “21세기 대명천지에 여러 현안이 있는데도 대통령마저 나서서 종북주의 운운하고,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도 국가관 운운하며 대한민국을 색깔로 뒤덮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당내 ‘486 주자’ 가운데 한명인 최재성 의원은 같은 날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임수경 의원과 백요셉 씨의 다툼은 조작적인 냄새가 짙다”며 의혹을 제기한 뒤 “일부 귀족탈북자가 쓰레기 정보를 양산하고 있다”고 맹공을 폈다.

종북 하나로 MB 측근비리 모두 묻히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대한민국 정치는 종북 논란에 장악됐다. 정권 말 현 정권을 둘러싼 온갖 비리와 의혹들은 ‘종북’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두 묻히고 말았다. 민간인 불법사찰, 파이시티 사건, CNK 주가조작 사건 등 이명박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사건은 때 아닌 종북 논란으로 정치권과 국민적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여야 모두 19대 국회 개원은 제쳐둔 채 종북 색깔론으로 연일 공방만 지속하고 있다. 민생현안이나 통합진보당 부정경선에 대한 본질은 외면한 채 정치권이 알맹이 없는 힘겨루기를 하면서 냉소적 시선을 받고 있지만 사태는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지난 7일 한 라디오인터뷰에서 “민간인 사찰 등 여러 현안을 종북 논쟁으로 덮으려는 것으로 굉장히 위험한 매카시즘적 발상”이라며 새누리당을 규탄했다. 민주통합당 모 의원도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복지, 경제, 민생, 평화문제 등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종북 이념논쟁은 하등의 도움이 안 된다”며 새누리당의 정략적 이념논쟁 자중을 거듭 당부했다.

새누리당 ‘색깔론 역풍’ 맞나

종북 논란이 격화되자 새누리당 내부에선 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당내 일각에서는 ‘선을 넘는 것 같다’는 자중론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려는 어떤 자들도 대한민국 국민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념 논쟁에 불을 지핀 것을 두고 곤혹스럽다는 표정까지 짓고 있다.

정두언 의원은 자신의 트워터에 “통진당 사태는 분명 우파진영에 유리한 국면”이라면서도 “근데 나서지 말아야 할 사람들까지 나설 경우 모처럼의 호재가 악재가 될 수 있다”고 이명박 대통령과 황우여 대표 등의 발언을 꼬집었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도 지난 7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새누리당이 계속 종북 문제에 집중할 경우 역풍이 불 것”이라며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통합당은 정공법을 택하며 여권의 공세에 적극 대응해가고 있다. 종북 관련, 의원 개개인의 발언도 위험수위를 넘나들며 계속해서 이슈를 만들어 가고 있다. 민주통합당 입장에선 이념 논쟁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분석실장은 7일 [일요서울]과 전화통화에서 “새누리당은 앞으로도 이념공세를 끊임없이 이어갈 것”이라고 언급한 뒤 “그러나 민주통합당내 일반 의원들에게까지 사상검증을 과도하게 들이댐으로써 이들에게 반격의 여지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되면 오히려 새누리당이 역공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율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본지와의 통화에서 “새누리당 측에서 이념논쟁을 갖고 얼마나 오버하는지가 중요하다”며 “이해찬 전 총리에게까지 사상검증을 하겠다는 것은 문제를 더욱 키우는 꼴이 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슈의 생명력은 그리 길지 않다. 대선이 6개월여 남은 상황에서 종북 논란도 차츰 시들어 갈 것”이라고 전한 뒤 “다만, 통진당 사태가 수그러들 때쯤 임수경 의원의 발언이 문제가 됐다”며 의원들 스스로가 좀 더 신중하고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박지원 원내대표는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수도 하지 않아야 한다”며 의원 개개인의 입단속을 주문했으며, 김한길 최고위원 역시 “새누리당이 정략적으로 조성하고 있는 신공안정국에 휘말리지 않도록 우리의 언행도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영환 의원은 “현재의 위기는 조․중․동이나 삼성동(박근혜 전 위원장의 자택)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며 의원들의 자성을 주문했다.

야권의 종북이 문제면 여권의 종미는?

종북을 둘러싼 여권의 총공세에 일각에선 반미운동이라도 펴야하는 것 아니냐는 울분이 터져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과 보수진영이 짜놓은 이념적 프레임에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종북논란에 휩싸인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은 지난 11일 한 케이블방송에서 ‘종북’ 관련 사회자의 질문을 받고 “종북 운운하는데 종미가 더 큰 문제”라고 일갈한 바 있다. 이어 경선 비례대표 자진사퇴를 거부한 같은 당 소속 황선 후보의 남편 윤기진 씨는 자신의 트워터를 통해 “종북은 없다. 단지 종미, 종일만 있을 뿐”이라고 이를 거들었다.

그러나 정치 전문가를 비롯한 야권 일각에선 종북에 대한 맞불로 종미를 택할 경우 대선을 앞두고 야권이 상당한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윤희웅 KSOI 조사분석실장은 “새누리당을 종미로 몰고 갈 경우 종미주의에 대한 국민적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논란을 더욱 크게 만들 수 있다”며 “만약 그럴 경우 야권은 부정적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율 교수도 “일반적으로 종미보다 종북이 훨씬 더 나쁘다고 인식되는 상황에서 이를 이슈화한다는 것은 대선을 앞두고 자살행위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번 기회에 야권이 종북주의에 대한 학습효과를 거둔 만큼 종미주의로 사태를 확산시키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민주통합당 모 의원도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야권이 종미주의로 맞불을 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종북과 종미는 별개의 문제”라며 “사안의 본질이 서로 다르다. 비록 친미적 정책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를 종북 논란과 연결 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의원은 “지금이 종북이 통하는 시대냐”고 반문한 뒤 “친미니, 반미니, 종북이니 하는 것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그저 수구꼴통의 프레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다만 한미FTA 문제를 거론하며 “19대 국회 개원 이후 이 문제를 본격화할 것이다. 현재 당에서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종미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더라도 개원 후 한미FTA 문제를 쟁점화 시키겠다는 것이다.

국회 상임위 관련 새누리당은 현재 야당 몫인 국회 법사위원장을 요구하는 한편 국방위와 외통위를 양보하겠다고 제안해 놓은 상태다. 만약 민주통합당이 외통위위원장을 맡는다면 19대 개원 초기 한미FTA가 또 다른 쟁점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민주통합당내 ‘한미FTA무효화투쟁위’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 의원은 8일 [일요서울]과 전화통화에서 “한미FTA 체결로 우리는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있다”며 “개원 후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다만 “한미FTA 문제를 놓고 종미니 반미니 규정하는 것은 반대”라며 이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피력했다.

<정찬대 기자> minch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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