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

이 책은 초기 한국 자본주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정착됐는지,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벌인 인물이 누가 있는지를 통해 근대 한국 자본가의 계보와 유형을 파악한 책이다. 한국 자본주의 연구에 몰두해온 저자가 근대의 다양한 자본가 양상을 사회적 신분, 배경, 자본 축적 토대와 경로 등의 기준으로 분류하고 각 유형을 대표하는 자본가들을 연구, 분석한 결과물이다.

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활발하게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한국 자본주의 발달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질문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란만 부각될 뿐, 정작 탐구해야 할 위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듯하다.

초기 자본가들의 사회적 배경은 어떠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대개 무반 출신이나 문벌양반가의 후손이 관료로 진출하지 못하고 쇠퇴하면서 호구지책을 위해 변신한 관부조달영업자, 실무 하급관료와 시전상인, 객주 등이 근대적 기업가로 성장하는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지주적 배경을 토대로 한 일부 관료 출신이 상업적 농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여 기업가로 변신하거나, 상인층이 개항과 정변ㆍ정쟁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자본 축적의 기회를 포착하여 기업가로 성장하는 경우가 한국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로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 경로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한 자본가들이 있다. 저자는 그러한 자본가들 가운데 일제 시기 최대 부호로 꼽혔던 민영휘·민대식·민규식 일가,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 전북 지역 최대 지주였던 백남신·백인기 부자, 목포·광주의 대표적인 대지주이자 기업가였던 현기봉·현준호 부자, 화신백화점 창업주 신태화, 부산의 민족자본가 안희제, 그리고 평양의 이승훈·이덕환 등에 주목한다. 이들은 신분과 사회적 배경, 또한 자본가로서의 성장배경이 달랐기 때문에 자본주의 생산방식이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생각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저자는 당시 언론기사나 광고뿐만 아니라, 특히 일본국립공문서관 소장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출자료를 발굴하여 해당 자본가들의 보유 증권 내역이나 자산 현황, 그들이 설립한 기업의 사업계획서, 자산신용조사서, 대출현황, 손익계산서 등을 토대로 그들의 다양한 자본 축적 방식과 궤적을 추적한다. 그들은 어떻게 자본을 축적했으며, 어떠한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 주도세력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먼저, 관료 출신으로 기업 설립에 참가한 유형으로 신분이나 직위를 이용한 청탁으로 각종 인 허가를 쉽게 받았는데, 그 대표 인물로 민영휘 일가를 소개하고 있다. 두 번째는 상업 활동과 무역업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기업에 투자한 상인층을 이야기하고, 세 번째로 재래업종에 종사한 수공업자, 공업학교 출신의 기술자가 소규모 제조업체를 경영하다 근대 기업가로 성장한 유형으로 금은세공업자에서 화신백화점 창업주로 성공한 신태화를 예로 들었다.

개항 후 초기 한국 자본주의는 관료 출신 혹은 어용상인층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권력을 배경으로 한 수탈이나 구문 수취 등에 의해 자본을 축적하거나 혹은 정부 관아를 상대로 한 조달업과 수세청부, 정부의 각종 근대화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자본 축적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권력과의 결탁에 의한 자본 축적은 이후 일제의 산업·금융 정책에 동승하는 방식으로 연장됨으로써 강한 예속성을 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민족경제권 건설을 위해 노력한 안희제와 민족기업을 설립ㆍ운영했던 이승훈의 경제 활동은 한국 자본주의의 또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그들이 국내 수요를 감안하여 대량생산체제를 지향했고, 또한 일본인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소자본의 열세를 소액 주주 모집과 주식회사 형태를 통해 극복하려 했다.

비록 기술과 자본 부족 등으로 사업체를 오래 경영하지는 못했지만 이 같은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때문에 그들의 경제 활동은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연원을 묻는 지점에서 협동조합운동이나 독립운동과 같은 그 사회정치적 활동과 함께 무거운 의미로 기억해야 할 유산이 아닐까 한다.

오미일 지음 |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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