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이창환 기자] 소설 <한국이 싫어서>, <표백>으로 알려진 장강명은 최근 가장 주목받은 젊은 작가다. 지난 8월 출간한 그의 신작 장편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은 구성과 문체임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인 신작은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 죄의식의 경계를 독자적이고 탁월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침체한 한국소설 시장에서 건조하고 서늘한 스타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소설가의 정신이 궁금해 인터뷰했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의 동기와 집필 과정은 물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질문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답해줬다.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싶다는 인터뷰를 봤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과 같은 개성과 파격을 버리지 않은 채로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가.
▶개성과 파격이 있는 베스트셀러를 만들면 좋겠지만, 대중적인 글도 쓴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판매 부수를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은 아니다.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주제와 구성방식, 그리고 문체를 담았다. 다양한 작가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많은 독자와 만나고 싶다’는 욕망을 인터뷰에서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싶다’는 말로 표현했던 것 같다. 많은 독자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도 독자들이 책을 사서 봐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독자도 좋아한다. 나도 책을 도서관에서 많이 빌려본다. 널리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우주의알’, ‘시공간 연속체’ 등장에 소설 초반이 난해했다. ‘우발적으로 고등학교 동창을 칼로 찔러 살해한 남자의 이야기’가 궁금해 계속 읽을 수 있었다. 어려운 서술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
▶다른 소설과 달리 독자 생각을 크게 하지 않았다. 좀 불친절한 구성과 전개방식이다. ‘읽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면 못하는 것이다’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이야기하려는 바와 글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가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 중 학교 운동장 묘사가 있다. 학창시절 혹은 그 나이 때 각인돼 오랫동안 기억에 머무르는 풍경이 있나. 서정적 묘사를 더 넣을 생각은 없었나.
▶학창시절이라고 하면 운동장과 함께 도서관도 생각난다. 서가가 있는 도서관도 생각나고, 서가 없이 자율학습을 하던 열람실도 생각난다. 나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싸늘하면서 단호한 사람이고, 그런 성격이 문장에도 배어 나온다. 그래서 글이 건조하다고 보는데, 소설에 따라서는 서정적인 묘사를 풍부하게 넣고 싶은 마음도 있다. 반면 어떤 소설은 가차 없이 서늘하게, 건조하게 쓰고 싶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독자가 능동적으로 상상하고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 소설 같다. 껍질만 읽는 독자를 걸러내고, 굳이 말하자면 소설을 깊이 있게 읽는 독자를 염두 한 부분이 있나.
▶‘이런 독자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이런 독자는 걸러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예스24’의 예스블로그에 <눈덕서니가 온다>는 소설을 연재한다. 이건 십 대 소년소녀를 생각하고 썼다. 그렇다고 중장년 독자가 읽지 않아 줬으면 하는 마음은 없다. 독자는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로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 나도 고전 중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책이 있다. 독자마다 독서의 깊이는 다르지만, 그걸 내가 판단하지는 않는다. 독자들이 내 의도를 무시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만의 해석을 하면서 책을 읽어주길 바란다.
 
-원래 소설의 구성, 형식 같은 것에 관심이 높았나.
▶관심이 많다. 다른 소설가들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에 관심이 많을 거로 생각한다. 어떤 물고기는 횟감으로 좋고, 어떤 물고기는 매운탕용인 것처럼 이야기마다 어울리는 형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뒤죽박죽 섞다가 어느 순간 독자가 이야기를 파악하게 만드는 수법은, 선례들이 많이 있다. 가이 리치 감독 영향도 받았다. 영화 <스내치>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같은 영화들이 그런 식이다. 아마 가이 리치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저수지의 개들>이나 <펄프 픽션>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통해 ‘기억 속 과거는 순서가 없다, 과거의 순서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느꼈다. 기억과 시간에 관한 영감의 꼬리가 많이 이어지는가.
▶글을 쓰면서 ‘현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과거를 규정하고, 그 과거가 또 현재를 규정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를 불행하지만 근대화도 함께 진행됐던 시기로 해석할 수도 있고, 수탈만 당한 기간으로 볼 수도 있지 않나. 그에 대한 논쟁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 인식과 분리되지 않는다. 각자 보고 싶은 식으로 과거를 본다. 동시에 과거에 대한 해석이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소설가는 치열한 몰입으로 캐릭터를 마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이를 자제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심사평 중 ‘인공적인 느낌이 있다.’는 언급에 공감했다. 캐릭터 몰입은 어떻게 하나.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종종 들었던 지적이다. 소설 속 인물들을 대하는 자세가 다른 소설가들에 비해 싸늘하다고 느낀다. 캐릭터를 어떤 도구처럼 대하는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캐릭터 이름을 짓는 작업에서 그런 걸 자각하기도 한다. 이 소설의 경우에는 아예 이름이 없고, 다른 작품에서 이름을 붙일 때도 그리 오래 고민을 하지 않는다. 몰입을 만약 감정이입으로 해석한다면, 창조한 캐릭터에 크게 감정 이입하지 않는 편이다. 글 속의 인물을 대할 때도 반영이 되는 것 같다. 창조주로서 만든 세계의 전체적인 미학이나 완결성을 위해 캐릭터와 거리 두기를 한다. 감정이입을 제외하고는, 어떤 면에서는 캐릭터에 깊이 몰입한다. 예를 들어 캐릭터의 동기에 대해서는 사소한 것까지 명확히 부여하려는 편이다.
 
-대중들이 영화와 음악에 익숙하다 보니 소설을 자주 읽지 않고, ‘소설이 읽히는 상태 혹은 자세’ 가 갖춰질 때만 읽는 것 같다. 소설을 읽어낼 수 있는 감정 상태라든가 소설을 쓸 수 있는 어떤 ‘상태’가 있나.
▶독서라는 행위가 다른 취미와 달리 굉장히 맹렬하게 두뇌를 가동해야 하는 것 같다. 술을 마신 뒤에도 음악은 들을 수 있는데 책은 읽기 힘들다. 하지만 그런 멀쩡한 정신 외에 다른 조건이 더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책이야말로 들고 다니기 좋은 도구이고, 충전이 필요하지도 않고,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물건 아닐까. 물론 어떤 감정 상태에 있을 때 그에 딱 어울리는 책을 만나게 되는 마법 같은 순간도 있는 것 같다. 소설을 쓸 수 있는 상태라면, 어떤 적당한 긴장 상태가 필요하긴 하다. 너무 가라앉아도 안 되고, 너무 흥분해도 잘 안 써진다. 가능하면 그런 중용 상태에 있으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한다. 낮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든가, 너무 흥분되면 잠깐 누워서 눈을 붙인다든가 하는 식이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읽으면서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앨리펀트’가 연상 됐다. 오래전 ‘씨네 21’ 리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영상을 통해 소설을 위한 재료를 만들고 응용을 하는가.
▶영화나 영상뿐 아니라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소설의 재료로 활용한다. 영화나 영상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적게 보는 것 같다. TV는 전혀 보지 않고, 인터넷으로 소식을 듣는다. 영화도 1년에 몇 편 안 본다. 그나마 보는 영화는 거의 SF 영화다. 책을 더 좋아하고, 의식적으로도 영화보다는 책을 많이 읽으려 애쓴다.
 
-사는 동안 할 말을 하고 싶어서 전업 작가가 됐다는 내용을 읽었다. 앞으로 쓰는 소설에는 자신을 따라다닌 혹은 지배하는 어떤 정신이 발현되는 것인지, 그 정신들은 언제부터 지니고 살았는지 궁금하다.
▶오랫동안 따라다니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다. 소설은 사실 모두 이 질문에 대한 것으로 생각한다. 내 소설도 일종의 질문 형태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20대부터 했던 것 같다. 원래 신앙이 있었는데 스무 살 즈음에 믿음을 버렸다. 그 후에는 ‘왜 사는가, 왜 살아야 하나’를 생각하게 됐다. 내세라든가 신이라든가 하는 게 없는 세계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은 사람이 살아야 하는 이유 같은 것은 솔직히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사는 방법’이 ‘살 이유’를 대신해서 중심을 잡아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자신에게 질문한다. 과업이 없는 시대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표백). 내가 하는 일에 의미가 없는 것 같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을 것 같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열광금지, 에바로드). 이 사회에서 버티기가 너무 힘든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한국이 싫어서).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면, 또는 과거가 내 삶을 갉아먹고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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