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이기우 언론인] 해묵은 ‘개헌’이 정치권에서 또 다시 거론되고 있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윤석열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에서 ‘개헌’의 불씨를 당겼다. 개헌 추진 방안에 대한 구상도 나왔다. 지금부터라도 개헌을 논의해 추진하자는 얘기인 셈이다. 다만 개헌 추진 방식 등은 안갯속이다.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을 놓고는 여전히 이견이 많다. 다만 개헌 이슈는 정국의 블랙홀이기 때문에 윤석열 정부가 2024년 총선 패배론이 기장사실화될 때 여소야대 정국 돌파 카드로 쓰여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 김진표 의장 4년 중임제 개헌 제안...尹 긍정적 밝혀
- 與 총선 패색 짙을 때 개헌으로 여소야대 정국돌파 카드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이원집정부제나 의원내각제, 또는 대통령 중임제로까지 정부형태를 개편하자는 기존 정치권의 개헌 논의와 거리를 뒀다. 대신 청와대 조직을 축소하는 방안을 거론했다. 후보 시절 윤 대통령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개헌론은 본질을 잊어버린 이야기”라며 “법률과 제도에 따라 대통령 권한이 통제되면 제왕적 대통령이란 말도 없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집권하면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며 “청와대에 대통령 권한 행사가 법률과 헌법에 맞는지 검토하는 부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된 후 민정수석실을 폐지하는 등 자신의 약속을 실현했다.
김진표 의장 윤에 개헌거론, 비교적 긍정의견 표명”
특히 윤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 한덕수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명하면서 ‘책임총리제’를 선언했다. 대통령에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을 내각으로 분산시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고, 책임 있는 국정 운영을 실현하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책임총리제·책임장관제’ 의지를 내비쳤다. 그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대통령임을 밝히면서도 “정부라는 것은 대통령과 총리, 장관, 차관 같은 주요 공직자가 함께 일하고 책임지는 구조”라고 말했다. 개헌에 대해서는 거리를 둔 셈이다.
이런 와중에 개헌론이 거론됐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의장단과 만찬에서 개헌 논의 필요성을 건의한 것이다. 이에 윤 대통령도 비교적 긍정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김 의장은 지난 21일 국회의장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윤 대통령에게 의장 직속 개헌추진자문위원회를 다시 만들어서 폭넓게 의견을 교환하고 개헌에 관한 논의를 공개적으로 추진해보겠다고 했다”며 “이에 대해 윤 대통령도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김 의장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만찬에서 “과거 대통령들은 개헌 이슈가 국정동력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되기 때문에 후보 때와 달리 개헌을 뒤로 미루다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의장은 “여소야대 정치 상황 속에서 오히려 개헌을 협치의 정치를 만드는 모멘텀으로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김 의장이 제안한 국민통합형 개헌에는 대통령 4년 중임제 등 내용이 포함돼 있다.
김 의장은 “(윤 대통령이) 개헌도 개헌이지만 선거법, 정당법도 같이 헌정 제도를 시대에 맞게, 변화된 정치 상황에 맞게 고치는 것도 같이 논의해볼 필요가 있지 않으냐‘고 물었다”고 했다. 이에 김 의장은 “이미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다뤄질 의제로 상정돼 있다고 말했고, (윤 대통령이) ‘정부로서도 적극 호응하고 같이 협의해 나가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정치권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참석자들에게 “저는 정치 개혁 전반에 대해 생각이 열려 있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발전에 필요하다면 논의 못할 주제는 없다”고 밝혔다.
정국 타개용 개헌이슈, 역대 대통령처럼 尹도?
반면, 대통령실은 김 의장의 개헌 관련 설명에 대해 말을 아꼈다.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개헌 관련) 일반적인 말이 오갔다”면서 “거기에 대해 비서실장인 제가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김 의장의 개헌 논의를 시작하겠다는 말씀에 윤 대통령은 ‘개헌이나 선거법, 정당법 등은 국회에서 논의가 깊이 있어야 한다. 그런 논의가 진행된다면 정부도 협의해 나가겠다’는 취지로 답한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김 의장은 윤 대통령에게 현행 5년 단임제에서 미국과 비슷한 4년 중임제로 바꾸자는 개헌을 제안했다.윤 대통령은 이에 대해 ‘국가발전을 위해서라면 그런 논의는 열려 있다’고 했다”면서도 “윤 대통령은 개헌 논의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 뜻을 밝혔지만 선거제도, 정당제도도 함께 논의해야 한단 입장”이라고 부연했다.
다만 개헌 논의는 5년마다 실시되는 대선에서 ‘개헌’은 빠지지 않은 단골 메뉴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매번 실패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거대 여당으로 만들었고, 궁긍적으로 내각제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을 꿈꿨다. 그러나 합당 당시 내각제 비밀각서에 도장을 찍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개헌드라이브에 강력반발했다. 여론 역시 집권세력의 “밀실야합”이라며 김 전 대통령에 가세해 개헌은 졸지에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재도 개헌을 거론했다. 두 사람은 ‘집권 후 2년 안에 내각제 개헌’을 다짐했다. 이를 통해 DJP 연합은 만들어졌으나 개헌은 무산됐다. 결국 대선 전 개헌 카드는 거대 보수 포위망을 뚫기 위한 DJ의 정치적 미끼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 대선 때도 개헌이 논의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통해 4년 중임제 개헌을 골자로 한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 그러나 야권 대선 주자들은 개헌의 정국 블랙홀 우려를 들며 반대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시 한나라당 대표 시절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일침하기도 했다.
이렇게 개헌을 무산시킨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던 박근혜 전 대통령도 ‘역사의 아이러니’를 피해 가지 못했다. 자신의 집권 4년 차 막판인 2016년 10월 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돌발적으로 개헌 추진을 선언했다. 공교롭게도 당일 밤 JTBC의 특종으로 ‘최순실 태블릿 PC’에 담긴 대통령의 연설문 수정본, 비공개 일정 등이 보도됐다. 이에 분노한 국민의 촛불에 박근혜와 함께 개헌론도 스러지고 말았다.
이처럼 개헌은 대표적인 국면전환용 이슈다. 정국 타개용으로 개헌 이슈를 던졌다. 모두 용두사미에 그쳤다. 역대 정권에서 높은 지지도일 때 개헌안을 꺼내는 것은 일종의 금기로 통했다.
‘꽃놀이패’ 개헌? 총선전후가 ‘분수령’ 될 듯
특히 임기 중후반을 내다보는 사전 작업적 성격이 짙다. 레임덕 국면에서 개헌 카드는 일종의 정치 공식이다. 이번에 개헌을 못 하더라도 향후 수세 국면에 몰릴 경우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카드다. 야권을 반대 프레임의 덫에 가둘 수만 있다면, 개헌 카드는 국면전환용 카드로 유효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레임덕(권력누수)에 빠졌을 때 으레 나오는 야권 공세의 명분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윤 대통령의 ‘최소 개헌’이 꽃놀이패로 불리는 이유다.
그래서일까. 정치권 안팎에서는 윤 대통령이 국정운영 지지율이 하락하는 등 2024년 총선 패배 기류가 강할 경우 역대 대통령처럼 ‘개헌 카드’ 를 꺼낼 수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야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이벤트는 개헌 뿐이 없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