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은 낙태를 해 본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마치 귀찮은 혹이라도 떼어내듯 부담 없이 말했다.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그가, 그래서 다른 남자의 아이도 자신의 호적에 친자로 입적시켜 준 그가 저런 여학생을 보고 얼마나 정나미가 떨어졌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웃음이 새어나오려고 입이 실룩실룩 움직였다. 

그는 결코 너같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아이는 좋아하지 않을 거야. 
“가까스로 만나서 임신 얘기를 하니까, 그는 냉정하게 돌아섰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현명한 여자라면 그런 문제는 알아서 처신할 거야. 남자한테까지 가져와서 징징거리다니, 천박하고 추하기 이를 데 없군.”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라면 생명을 없애지 말라고 꾸중을 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사람의 몸에 있는 생명은 남의 생명이라도 귀하지만, 소중하지 않은 사람한테 있는 생명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덜 할 테니까 말이다. 

“아이를 떼라는 말 같았어요. 저는 너무도 절망스러웠어요. 임신 사실을 알면 지훈 씨가 결혼하자고 할 줄 알았거든요. 저를 사랑한다면 결혼해서 아기를 낳으면 아무 문제 아니잖아요. 지훈 씨가 나이가 많으니 아이가 급하기도 할 거고요.”

그럴 리가 있나? 새 작품 발표하면서 나와 결혼하기로 돼 있는데... 넌 그저 그가 잠시 허한 틈을 타서 비집고 들어왔던 허깨비에 지나지 않아. 스쳐 지나가는 환영이라고. 자기 주제를 파악할 줄 알아야지. 

“그렇지만 지훈 씨를 위해서라면 좀 더 기다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새 작품 완성하느라 바쁜 그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지요. 그렇지만 돈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부쳐 주신 용돈은 지훈 씨랑 데이트하면서 이미 다 써 버렸거든요. 그래서 수술비를 좀 대달라고 했지요. 제 속마음으로는 둘이서 절반씩 책임이 있으니까 지훈 씨가 수술비 대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주장도 일리는 있군. 그런데? 그랬더니?

“그랬더니 지훈 씨가 화를 벌컥 내는 거예요. 알아서 하라니까 추접스럽게 웬 구걸이야? 넌 앵두가 아니라 앞으로 칡덩굴이라고 불러야겠다. 다른 나무를 칭칭 감고 올라가는 귀찮은 존재, 칡덩굴. 웬 젊은 애가 그렇게 의존적이니?”

여학생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받은 상처가 너무도 큰 모양이었다. 
과장하는 거겠지. 이 아이가 덧보탠 부분이 많을 거야. 그가 그럴 리가 있나? 그렇게 자상한 사람이... 

“그러면서 제게 10만 원짜리 수표를 던져 주더군요. 임신한 지 오래 안됐으니 이 정도면 되지? 하면서요.”
10만 원? 낙태 비용이 그렇게 싼가? 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제거하는 비용이 그렇게 싸단 말이야? 

생명을 갖기 위해 시험관 수정으로 수백만 원씩 여러 차례 지불해 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참으로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하긴 뭐, 없는 걸 있게 하는 것보다 있는 걸 없애는 게 더 쉽겠지.

“아이를 낙태하고 난 후 우리는 사이가 많이 회복되었어요. 그때부터는 지훈 씨가 제 원룸으로 찾아왔지요. 자기 아파트는 이모님이 자주 오셔서 부담스럽다고요. 우리는 다시 사랑을 나누었지요. 그럴 때마다 그는 제게 알아서 피임을 철저히 하라고 다짐시키곤 했어요. 지난 번 낙태 수술로 힘들지는 않았느냐고 위로해 줄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없더군요. 섭섭하긴 했지만 그건 잠시였어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니까요. 그가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이후로 아예 제 원룸에 와 있었거든요.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뭐? 너와 있었다고? 탈고하러 며칠 절에 가 있겠다고 가방을 싸더니 네 집에 가 있었다고? 
“그런데 며칠 전 그가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짐을 정리해 제 오피스텔을 떠났어요.”

그때 그는 원고를 완성했다며 집으로 왔다. 절에서 방금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런 그에게선 싱싱한 산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그 냄새가 코를 자극해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고 말았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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