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학생의 원룸에서 왔다면 어떻게 그렇게 신선한 산 냄새를 풍길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냄새란 게 실체가 없는, 내가 만들어낸 환취에 불과한 것인가? 
“그 이후 벌써 몇 번째 만날 약속을 어기더니 오늘 밤 12시까지 제 원룸 앞 까페에서 만나기로 해놓고 나서도 안 오는 거예요.” 

사연은 여기까지였다. 전말이 이러했다. 
이 아이의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의 행적이 정말 이러했을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어냈다고 하기엔 너무도 스토리가 완벽하고 묘사가 정교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지어내서 이 아이한테 도움이 될 게 무엇이 있겠는가 생각해 보니 그럴 만한 동기가 전혀 없었다. 

“너, 참 경솔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나는 어떻게 하면 한마디로 이 아이를 퇴치할까 궁리하다가 결정적인 말을 찾아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사실이라고 치더라고 그래. 그런 이야기를 왜 내게 와서 하는 거니? 그 사람의 이미지를 위해 여태껏 비밀을 지켜 왔다면 지켜 주어야지 발설해서 어쩌자는 거야? 네 자신이 지금 얼마나 경망스러워 보이는지 알기나 하니? 그는 자유인이야. 자유혼을 가진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속박하려 들다니, 그런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어?”

여학생은 내 말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리고는 힘없이 일어났다. 
“제 생각이 짧았나 봐요. 사랑이란 소유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지훈 씨를 온전히 혼자만 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자꾸 앞서요. 기다릴게요. 지훈 씨의 영혼이 자유롭게 절 찾아올 때까지요. 이모님께서 그렇게 전해 주세요.”

그 여학생은 순순히 내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등에 멘 배낭을 도로 내리더니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이거요, 지훈 씨가 짐 챙길 때 빠트리고 간 건데요, 귀한 자료인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하나는 면도기고, 또 하나는 누런 대봉투에 담긴 서류 같은 거였다. 면도기는 그가 즐겨 쓰는 질레트였다. 서류 봉투는 겉에 출판사 주소가 인쇄돼 있는 것이었다. 
여학생이 돌아가고도 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이야기를 여학생은 너무도 실감나게 자세히 풀어놓고 갔다. 그러나 여학생이 돌아가고 나니 모든 게 다 꾸며낸, 황당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작가들 따라다니더니 스토리 하나 완벽히 꾸며 왔는가 보군. 
난 이렇게 일축해 버렸다. 

그는 절에서 돌아온 뒤 작품 탈고한 후유증을 심하게 앓았다. 세상이 모두 끝나 버린 듯 허탈하다고 했다. 산고를 겪은 산모의 산후 우울증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며칠을 무기력하게 보내더니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훌쩍 떠나갔다. 나는 그 틈을 타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을 그리기 위해 아기까지 고모에게 맡기고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여학생이 건네 준 서류 봉투를 그의 방 책상 위로 갖다 놓았다. 이걸 누가 어떻게 전해 주었다고 말하나 하고 고민하느라 그의 방 침대에 한참이나 걸터앉아 있었다. 

이 속에 뭐가 들었을까? 
갑자기 서류 봉투 안의 내용물이 궁금했다. 그래서 열어 보기로 했다. 봉투를 봉한 테이프를 뜯어내고 내용물을 꺼냈다. 

‘그 여자의 늪’의 시인 송지훈 실화 소설 
그 여자의 성(城)

책을 내기 위한 교정지였다. 그가 최종 교정을 본 듯 곳곳에 그의 필체로 수정이 되어 있었다. 내겐 책으로 나올 때까지 비밀이라며 굳이 보여 주지 않았다. 시를 쓰던 그가 소설을 처음 쓴 것이었다. 그렇지만 실화라고 한 걸 보니, 완전한 허구를 쓴 것은 아닌 듯했다. 

- 진성희는 호텔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갔다. 간밤에 전남편 생각을 하느라 한잠도 자지 못한 것이 억울해 일출이라도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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