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우리가 회사를 떠난 뒤에 배달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장 이사가 대꾸했다.
“오후 3시 이후라......”
추 경감은 지포라이터를 철컥했다. 웬일인지 불꽃이 피어올랐다.
“3시 이후에는 무슨 일정이 계십니까?”

재빠르게 담뱃불을 붙인 추경감이 득의양양하게 라이터 뚜껑을 닫으며 물었다.
“그건 항상 정해진 일정이지요. 3시에는 실험배양실로 가서 배양물을 살펴보게 되어 있지요.”
“그건 항상 고정되어 있는 건가요?”

“예, 토요일을 빼고는 항상 하는 일이지요. 물론 한창 급할 때는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가 없었습니다만, 이제는 이식이 잘 되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검사는 매일 해야 하기 때문에 연구실 직원들 중 몇은 항상 실험배양실에 머무르지요. 제가 하는 일은 본래는 일단 난관에 걸려야 제대로 얻어지는 그런 종류의 일입니다.”

장 이사는 강한 어조로 말을 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듯했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이번 제품 때문에 잡힌 일정이시라는 거군요.”
“예, 그렇지요.”
“그럼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배양실이라는 곳에 오후 3시에 가는 건 본래 장 이사님이 하시던 일이십니까?”

“아닙니다. 본래는 김박사님이 하시던 일이지요. 사실 일이 이정도 단계에 이르면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해 무방합니다. 따라서 저하고 김 박사님, 둘 다 이 일에 아둥바둥 매달릴 필요는 없지요. 그래서 관리적인 차원에 이른 요맘때는 거의 김박사님이 일을 관장하셨더랬지요. 그게 갑자기 제게 떨어져 사실 어제는 새삼스럽게 기록들을 살펴보느라
고생했습니다. 허허.....” 
장 이사는 느긋하게 웃음을 지었다. 죽음의 협박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저, 잠깐.”

이 이사가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는 듯싶었는데 바짝마른 입술을 혀를 내밀어 축였다. 이이사의 얼굴에 땀이 촉촉이 배어 있는 것을 강 형사는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  이사는 그런 강 형사의 눈초리를 의식했는지 손수건을 꺼내서 얼굴을 닦으며 걸음을 빨리해 문 밖으로 나갔다. 강 형사가 쫓을까말까 망설이는데 추 경감이 말했다.

“장 이사님, 오늘은 저희와 함께 계셔야만 되겠습니다.”
“허허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경감님도 이 거짓부렁 장난을 믿으시는 겁니까?”
장 이사는 크게 웃었다. 백 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의 배가 출렁했다.
“어찌되었든 저희로서는 이 문제를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장 이사는 혀를 끌끌 차며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동감이라도 구하려는 것 같았지만 모두들 긴장한 얼굴로 장 이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허허.....”

오히려 이런 분위기에 장 이사는 질린 것 같았다.
 “왜들 이러십니까? 마치 제가 정말 죽기라도 할 것 같군요.”
 장 이사는 짜증스럽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오늘 일정은 모두 취소해 주십시오.”
추 경감은 담배를 끄며 잘라 말했다. 장 이사는 추 경감을 흘긋 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좋습니다, 경감님, 하지만 오늘 3시에 실험배양실에는 꼭 가야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하라는 대로 다 해드립죠.”
어느 정도 비아냥거리는 투가 섞여 있었지만 추 경감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때쯤 해서 이이사가 다시 들어왔다.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강 형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사는 잠깐 몸을 흠칫했다.
강 형사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머리에 새겨 넣었다.
“아침 먹은 게 안 좋은지 배탈이 나서......”
이 이사는 능청맞게 대꾸를 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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