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과장에서 인정받아 전하께서 내리신 벼슬 자리에 있고 천문 지리에 관해서는 배울 만큼 배운 놈입니다. 그런데 왜 애매한 이놈의 할아버지까지 욕보이십니까?”
김용세는 내친김이라 생각하고 할 말을 다해 버렸다.

“아니, 놈이라니? 어따 대고 놈이라고?”
유한우가 팔을 걷어붙이며 펄펄 뛰었다.
“김용세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
아까부터 마음 속으로 꽁하고 있던 이양달이 김용세를 거들고 나섰다.
“일리는 무슨 얼어죽을 일리야!”

이번에는 배상충이 유한우 편을 들고 나섰다. 네 사람이 어울러 맞고함을 지르고 싸우기 시작했다. 이때 좀 떨어진 곳에서 이지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왕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짓들이냐?”
왕이 크게 화가 나서 얼굴을 찌푸린 뒤에야 이들의 싸움이 멎었다.
“전하.”

이지란이 엎드린 채 말을 이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하늘이 무너진 국상중입니다. 그런데 죄인된 신하들이 저들의 지은 죄는 모르고 저렇게 망동을 하고 있으니 엄벌함이 마땅한 줄로 아룁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행하고 있는 밀직부사(密直副使)를 불렀다.
“저기 철없는 자들을 엄히 다스리렸다.”

사소한 일에는 관대한 전하가 이렇게 엄명을 내리게 된 것은 이지란의 말대로 국상중의 불충에 크게 화가 난 것 같았다.
김용세는 눈앞이 캄캄했다. 20대 젊은 나이에 종5품까지 오른 그의 벼슬 길이 여기서 막히고 만다는 생각을 하자 눈물이 왈칵 솟았다. 갑자기 비명에 간 아버지의 유언이 생각났다.

‘권력과 가까이 하지 말라.’
궁으로 돌아오자 내일 아침 진시, 즉 8시 까지 유한우, 배상충, 김용세, 이양달은 밀직사(중추원의 옛 이름)에 나와 판밀직사사의 처분을 받으라는 전갈이 왔다.

보통 죄인을 다룰 때는 형조(刑曹)에서 다루는데 밀직사로 나오라고 하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밀직사란 왕궁을 호위하고 궁전 안팎의 경계를 맡은 무반이 주가 된 기구이다. 왕과 왕비, 왕족들의 안전을 책임진 부서임은 물론이다. 이때는 이미 그 관직명을 중추원으로 바꾸었지만 옛 이름대로 그냥 밀직사라 불렀다.

김용세는 퇴청하기 전에 개인 소유물을 따로 챙겼다. 내일이면 이곳에 다시 올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김용세는 그날 있었던 천체의 기록과 일보를 가지고 승정원에 보고하러 갔다. 근정문 앞으로 가기 위해 사복시(司僕寺)의 연고 앞을 막 지날 때 였다.

“이 사람 서운관 김 주부 아닌가?”
말 앞에 서있던 키가 훤출하고 눈이 부리부리한 남자가 그를 불렀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다섯째 왕자이며 정비 한씨 소생인 정안군(靖安君) 방원이었다. 김용세가 아직도 종6품직인 주부인 줄 아는 모양이다.
그는 방금 빈소에서 온 듯 굴건 상복 차림이었다. 상제는 시신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 법도이나 친어머니가 아닌지라 자리를 비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김용세의 머리를 스쳤다.

“대군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김용세는 정안군과 안면이 있었다. 성 안 남부에 있는 정안군의 사저 집터를 보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곳에 간 일이 있었다. 김용세가 잡아준 집터에 방원은 매우 만족한 기색이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은밀히 김용세를 불러 자신의 운명에 관한 비기의 해석을 요구했다.

개경시대부터 전래되어 온 비록들이 서운관에는 엄청나게 많이 쌓여 있었으나 모두 제대로 해석을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김용세의 재주는 방원에게 매우 유익했다. 
정안군은 자기뿐만 아니라 현비나 방번, 방석에 대한 장래의 운도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장차 자기와 대업을 같이하자는 맹세도 요구했다.
“오늘 산 찾는 일은 잘되었느냐?”

방원이 김용세의 불안한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읽었는지 조용히 물었다.
“실은 말씀드리기 황송하오나 소인 등이 상감께 큰 불충을 저질러…….”
김용세는 낮에 있었던 일을 대강 이야기하고 이제 앞으로 더 이상 정안군을 돕지 못할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내 장담할 수는 없지만 힘써볼 테니 너무 걱정 말게. 볼기나 몇 대 맞을 각오를 하게.”

방원은 그렇게 이야기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추문 쪽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과묵하고 결단력 있어 보이는 방원은 그 외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범접하기를 꺼렸으나 김용세는 가까이 할수록 그가 부드럽고 인정 많은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힘써 보겠다고 했으니 빈말은 아닐 것이다. 김용세는 일말의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일생에 가장 불안한 하룻밤이 지난 이튿날 아침 일찍 밀직사로 나갔다. 거긴 순군만호부 사령들이 와 있었다.

“상감마마께서 너희들을 특히 어여삐 여겨 형장으로만 다스려 중전 마마에 대한 불충을 씻도록 특별히 윤허하셨다. 유한우 곤장 20대, 배상충 곤장 20대, 김용세 곤장 10대, 이영달 곤장 20대.”
김용세로서는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현비가 승하한 지 9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직도 능터를 잡지 못한 왕은 근심이 태산 같았다. 왕은 거처를 강령전에서 현비의 시신이 안치된 옛 궁전인 남경궁으로 옮겼다.
왕은 그날도 조회를 받지 않았다. 대신 아침 일찍부터 사복시에 말을 대령토록 일렀다. 왕은 빈궁이 설치된 후 흰 저포로 상장을 단 소연(小輦)을 타고 행차했으나 이 날은 말을 타고 행차했다.
곤장 20대를 맞은 유한우와 배상충, 이양달은 수행하지 못하고 다른 감후 한 사람과 주부 두 사람, 그리고 김용세가 수행했다.

전하의 행차는 공사가 한창인 흥인문을 지나 안암으로 향했다. 흰 관에 흰 저포 상복을 입고 말을 탄 왕의 풍채는 만군을 호령하던 함길도 고원의 장군 모습 그대로였다.
왕의 행차가 안암 석산 아래 이르렀을 때 일행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왕이 말에서 내려 쉬어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곧 차일이 쳐지고 쉴 수 있는 그늘이 만들어졌다. 수행하던 여러 부서의 관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땀을 씻었다.

김용세는 어제 맞은 곤장 독이 풀리지 않고 엉덩짝이 얼얼해 나무 밑에 비스듬히 돌아서 있었다. 정안군 덕분에 그나마 이만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모두 파직되어 귀양을 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중전마마가 안 계시니 앞으로 대군들 처신이 볼 만할 거야.”
나무 뒤에서 내시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말일세. 그 어리신 세자께서 견디실지.”
누군가가 맞장구를 쳤다. 목소리로 짐작컨대 그 사람도 내시임에 틀림없었다. 김용세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견디기 어려울걸. 세자께서는 원래 성정이 나약하고 인정이 많으신데다…… 중전마마가 더 살아 계셨어야 하는 건데…….”

“호시탐탐 권좌를 노리는 대군들이 한둘이라야지.”
“다른 대군들이야 무슨 딴 생각을 가지려고, 정안군 나으리와 의안군 나으리가 문제라면 문제지.”
“정안군 나으리야말로 얼울한 점이 없는 게 아니지요. 왕조를 일으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우셨고 왕자의 순위로 보나 인물로 보나…….”

“그러나 정안군이 중전 마마나 상감마마의 뜻을 어기고 사욕을 채울 소인은 아니지.”
“봉화백(奉化伯) 대감이 시퍼렇게 살아 계신데 세자 저하에게 무슨 변괴가 있겠는가.”
봉화백이란 왕이 정도전에게 내린 공신 봉작이다. 그의 향리가 봉화이기 때문에 연유된 명칭이다.
“근데 말이야. 중전 마마가 제 명에 승하하신 것이 아니란 말이 있어.”
“뭐야? 그럼 누가…….”
“쉿.”

“어쨌든 우리는 나서지 말아야 하네. 잘못하다간 어느 칼에 목이 달아날지 모르니까.”
김용세는 숨을 죽인 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장차 이 나라 궁전에 무서운 피바람이 불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그날 왕은 능 자리를 마침내 정하고 산림도감으로 하여금 땅을 파보도록 지시하고 환궁했다.

그러나 이튿날 안암 능터 땅 속에서 물이 솟는다는 좋지 못한 보고가 있었다. 능터는 취소되고 능터 잡는 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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