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설마, 그런 남녀가 있다면 직업적인 사람들이겠지요.”
“요즘 세상에 아가씨 같은 순진한 사람도 있군요.”
여자는 더 이상 말상대가 안 된다는 투였다.
“그렇지만 여선생님이 설마...”

“선생 아니라 교장이라도 그러려면 그럴 수 있는 것이지요.”
“교장이라고요? 고문직 교장 선생님을 혹시 아세요?”
나봉주는 느닷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서 물어 보았다.
“아뇨.”

고개를 저었다.
“별다리 초등학교 선생님인데... 그 여선생님이 다니던...”
여자는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생각나요. 그 여선생이 죽은 뒤에 두어 번 여기 왔었어요.”
“그래요?”

나봉주는 귀를 곤두 세웠다.
“무엇 때문에 오셨나요?”
“그날 밤 그 여선생님과 같이 온 남자가 어떤 사람이었나를 꼬치꼬치 물어 보시더군요. 그뿐 아니라 두 사람이 정말 같은 방에서 잤느냐, 그 방을 보여 줄 수 없느냐, 그 남자가 잘생겼더냐, 뭐 그런 걸 자꾸 물어 보더군요”

나봉주는 고문직 교장의 얼굴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나이 환갑에 가까운 사람치고는 정력적으로 생긴 사람이었다. 온화한 얼굴이 교육자다운 풍취를 풍기고 있었다. 남의 스캔들이나 캐러 다닐 그런 인상을 가진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조은하 선생에 대한 태도는 집요하고 엉뚱한 데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가 조은하를 짝사랑했거나 아니면 은밀한 연인의 관계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 이 여관에서의 행동은 질투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봉주는 고문직 교장이 무슨 열쇠를 가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관에 가방을 둔 채 저녁 무렵 학교로 고문직 교장을 찾아갔다.
“안녕하셨어요?”
마침 퇴근을 하려든 참인지 가방을 챙기든 고문직 교장 선생을 만났다.
“아니, 이게 누구요? 서울 사시는...."

“예. 나봉주예요. 전에 조은하 선생 동생 되는 조준철 씨와 같이 뵈었지요.”
나봉주가 공손히 절을 하며 인사를 했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전신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요즘 서울에서는 이렇게 차리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죠.”
그것을 의식한 나봉주가 엉뚱한 말을 했다.
“아가씨는 농담도 잘 하시는 군요.”

“불쑥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요 위에 있는 장미사에 아는 스님이 있어서 왔다가 교장 선생님께 인사나 드리려고 찾아 왔는데 계셨군요.”
“아, 그렇게 되었나요. 마침 내가 나가려든 참인데... 가만 있자 우리 어디 가서 가볍게 한잔하면서 이야기나 좀 할까요. 서울의 패션에 대해서... 하하하...”
교장은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순진한 웃음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암. 미인과 함께인데 괜찮고 뭐고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나란히 학교를 걸어 나왔다.
“버스를 타고 조금 가면 소나타라는 곳이 있는데...”
“소나타요? 자동차 파는 상점이에요?”

“자동차? 하하하... 자동차가 아니고 음악과 술과 낭만을 파는 곳이지.”
나봉주는 고문직이라는 중늙은이가 보기보다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멋도 알고 유머도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두어 정거장 가서 내렸다. 소나타라는 조그만 간판이 붙은 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주인은 무용을 하는 사람인데...”
나봉주는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이곳만이 풍기는 특이한 분위기에 홀렸다.

그리 크지 않은 실내는 가운데 동그란 무대를 중심으로 주위에 여나 명의 손님들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무대 가운데는 무용의상을 입은 남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남자 무용가는 마치 스페인의 투우사 같은 복장을 하고 발과 팔을 절도 있게 움직이며 춤을 추었다. 주변에는 그 남자가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무용복이 그의 흑백 사진 틈틈이 걸려 있었다. 고급스럽고 예술적인 분위기가 충만했다.
“저게 훌라멩고라는 춤이지. 저 사람은 조훈이라는 사람인데 춤과 함께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지요.”

“아직 젊어 보이는데요.”
나봉주가 빈자리에 앉으며 나직이 말했다.
“작년에 환갑을 지냈다고 합니다. 훌라멩고는 우리나라 제일인자라고 해요. 세계 곳곳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여기가 고향인가 보죠?”
“아니야. 그냥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여기가 가장 예술적 분위기가 넘치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면서 저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지.”
“이런 시골에 있기는 아까운 분 같은데요...”

반주가 격렬해지자 그의 움직임도 절정에 달했다. 갑자기 반주가 그치고 그의 동작도 뚝 그쳤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봉주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나봉주와 고문직 교장은 칵테일을 시켰다. 술기운이 약간 오르자 나봉주가 먼저 조은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조은하 선생의 아이는 잘 자라고 있나요?”
“명랑하게 구김살 없이 키우기 위해 힘쓰고 있어요. 그게 죽은 은하 씨를 기쁘게 해주는 길이라고 생각하거든.”
나봉주는 그가 조은하를 은하 씨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 선생이거나 조은하 씨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호칭이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교장 선생님과 조 선생님이 가까이 지냈는가 봐요.”
“가깝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은하씨는 첫사랑의 망령에 사로 잡혀 헤어나지 못했어요. 안타까운 일이지...”
고문직은 갑자기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면서 숙연해졌다. 그의 인자한 얼굴에 슬픔이 번져 나갔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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