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하의 애정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고문직 교장이었다. 조은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여인처럼 말해 오던 그였다.

행여나 누가 조은하에 대해 불미스러운 말이라도 할까봐 지나치리만큼 신경을 쓰던 그였다. 그런데 태도가 달라졌단 말인가? 조은하의 첫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다니. 나봉주는 내심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그의 말을 풀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조은하 씨 같은 정숙한 여자라면 연애도 아름답게 했을 거예요. 그래 그 상대는 누구였나요?”

나봉주가 칵테일 잔을 반쯤 비우면서 고문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은하씨는 근 20년 전에 한때 사랑하던 남자가 있었나 봐요. 외롭고 괴로워질 때는 가끔 그 남자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 남자가 준 선물이라면서 표지가 낡고 찌든 책 한 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 남자는 지난여름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답니다.”
“그게 무슨 책이었나요?”

“내가 가지고 있는데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아랑이라는 사람이 쓴 ‘행복론’이라는 책이랍니다. 속표지에 그 사람의 이니셜로 보이는 영자 사인이 있었어요.”
“무슨 자 무슨 자였나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여간 은하 씨는 그 남자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아까부터 교장 선생님은 망령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그러면 그 남자가 죽었다는 말씀입니까?”

나봉주가 남은 칵테일을 마저 비우면서 말했다. 고문직 교장은 양주를 스트레이트 잔으로 마시고 있었다. 그도 넉 잔을 비우고 다섯 잔째를 들고 있었다. 술기운이 조금 올라서인지 말이 좀 많아졌다.
“자기 곁을 떠난 사랑이라면 망령이지 뭡니까? 사랑이란 두 사람이 서로 존재를 인정하고 있을 때 성립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은하는 없어진 망령에 사로잡혀 곁에 있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은하 씨라고 하더니 이제는 ‘씨’자도 빼어 버리고 그냥 은하라고 불렀다.
“곁에 있는 진실이란 무언 데요?”
나봉주가 미소 띤 얼굴로 고문직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약간 실룩거렸다. 술기운이 좀 오른 것 같았다.
“은하는 만질 수 없는 무지개만 쫓아다니고, 제 곁에 다가선 정자나무는 눈에 보이지 않던 그런 여잡니다.”

고문직은 어렴풋이 짐작만 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몇 번이나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봉주가 정곡을 찔러 보았다.
“조은하 씨에게 선생님의 진심을 고백해 보시지 그랬어요.”
“아니, 뭐 내가 은하를 짝사랑이라도 했단 말이요? 뭘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다만 은하가 엉뚱한 망령 때문에 제 인생을 그르칠까봐 그게 안타까웠을 뿐인데...”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쥐었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다.
“선생님!”
나봉주가 부르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뜻밖에도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닦으세요.”

나봉주가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받지 않고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은하도 나를 못 잊을 거야. 은하야말로 나를 사랑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죽다니... 그렇게 죽다니... 모두가 내 탓이야.”
“그렇게 죽다니요? 은하가 누구한테 어떻게 죽었는지 아시나요?”
나봉주는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고문직이 분명히 무슨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놈이 죽였지. 모두 사랑 때문이야.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고문직이 갑자기 유행가 구절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놈이 누구냐 말이에요.”
“그놈? 하하하... 나야 나. 하하하...”
고문직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주사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선생님 취하셨군요. 이제 집으로 가요.”
나봉주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나봉주는 막차인 듯한 버스를 타고 고문직 교장의 집으로 가면서 그에게 계속 물어 보았다. 술기운 때문에 오히려 진실을 털어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은하를 죽인 사람은 서울서 온 옛날 애인이 아니었나요?”
“옛날 애인? 20년 만에 찾은 애인을 왜 죽이겠어? 아니야 그 고통스러웠던 세월을 생각하면 죽이고 싶었겠지. 암 나 같아도 죽였을 거야”
그의 이야기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러면 조은하를 죽인 사람은 옛날 애인이 아니고 조 선생을 감시하던 사람이었나요?”

나봉주는 장미사에서 들은 정체불명의 청년을 떠올리며 물어 보았다.
“감시? 은하를 무엇 때문에 감시한단 말이야? 그 여자가 정조 관념이 얼마나 강한데... 요즘 여자하고는 달라요.”
“그게 아니고...”

“음. 그 서울서 온 녀석을 감시하던 녀석 말이군.”
“예? 그런 사람이 있긴 있었군요.”
나봉주는 드디어 고문직이 무언가를 털어놓는다고 생각했다.
“버스가 다 온 것 아니야? 우리 내려야지.”

고문직은 갑자기 제정신이 든 듯 벌떡 일어섰다. 나봉주는 고문직을 부축하고 그의 관사로 들어갔다. 전에 와서 하룻밤을 묵었기 때문에 낯 선 집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문직 교장은 그 이야기는 다시 더 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나봉주는 마당에서 산책하고 있는 고문직 교장과 마주쳤다.
“방이 불편하지 않았소?”

고문직의 표정은 어젯밤과 전혀 달랐다. 근엄하고 평온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젯밤에는 좀 과음하신 것 같았는데요.”
나봉주가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어험. 뭐...”
그는 약간 겸연쩍어했다. 어젯밤에 뱉은 말이 마음에 걸리는 지도 몰랐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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