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하 씨에게 옛날 애인이 준 행복론이라는 책이 있었다고 했죠? 좀 보여 줄 수 있어요?”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
나봉주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몹시 당황했다.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다고 했는데요?”
나봉주는 말을 뱉어 놓고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죽은 여인의 사랑의 선물을 왜 고문직 교장이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건 말이야...”

교장은 겸연쩍어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가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조 선생이 그렇게 갑자기 죽고 난 뒤 유품들이 모두 불태워졌는데... 나중에 그 책이 폐허처럼 된 조 선생의 방에서 뒹굴고 있기에 내가 무심코 가져다 두었는데... 평소에 조 선생이 소중하게 생각한 것 같아...기회가 있으면 조 선생의 무덤 곁에서 태워 줄까하고...”

“아니, 조은하 씨는 화장을 하지 않았습니까? 무덤이 있나요?”
나봉주는 또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참 그랬던가? 이거 이제 기억력이 이렇게... 어쨌든 그 책이 어디 있나 좀 보지요.”
고문직 교장이 방안으로 들어갔다가 금세 나왔다.
“이거 같은데..."”

그가 낡고 조그만 책 한 권을 들고 나왔다. 초록색과 붉은 색의 추상화 같은 무늬가 있는 4, 6판 하드커버의 책이었다.
책을 받아든 나유미는 거기에 조은하의 손때와 체취가 배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책장을 넘겨보았다.

‘하늘 높은 가을날. 높이 있는 나의 은하수에게. CS.’
청색 만년필로 쓰여진 메시지가 세월에 바랜 채 남아 있었다. ‘은하수’란 조은하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CS란 이니셜은 이 책을 선물한 사람의 이름일 것이다.
‘나의....’ 어쩌구 한 것을 보면 연인 사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CS란 누구라고 말한 일이 없었나요?”

나봉주가 책의 이곳저곳을 살펴본 뒤 고문직 교장에게 물어 보았다.
“그런 게 씌어져 있어요? 글쎄요. 그 책을 준 사람이 아마 사귀는 사이였겠지. 첫사랑의...”

고문직 교장이 말을 얼버무렸다.
“조은하 씨의 애인을 본 일이 있어요?”
“본 일은 없지만...”
“이야기는 들었다는 말씀이군요. 이니셜로 보아서... c.s란 조씨 성이나 장씨, 정씨 뭐 그런 것 아닐까요?”
나봉주가 책장을 넘겨보면서 말했다.
“차씨도 있고 추씨도 있고 최씨도 있는데...”
고문직 교장이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참, 추씨라니까 생각이 나네요. 처음 조은하 씨의 시체를 발견한 곽 경감이 그러는데 조은하 씨는 죽던 날 밤에 혈액형이 B형인 남자와 동침을 했다고 하더군요. 혈액형이 B형이고, 흰 점퍼차림의 귀공자 스타일 40대 남자, 그런 사람과 동침을 했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혹시 이 C.S의 주인공이 아닐까요?”
나봉주는 이렇게 말하면서 고문직 교장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고문직은 대단히 듣기 거북 한 듯 입을 약간 실룩거렸다. 면도를 하지 않아 희끗한 수염이 움찔거렸다.

“조은하 선생은 그렇게 아무 남자하고나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라구. 더욱 건달 같은 남자와 여관방에서 천박한 잠자리나 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그 남자와 몸을 섞다니... 말이 안 돼! 뭔가 오해가 있을 거야. 그런 여자가 아니란 말이야.”
고문직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부검 결과 그녀의 질에서 남자의 정자가 나왔다고 하던걸요.”
나봉주는 일부로 고문직의 화를 돋울 셈으로 이렇게 자극적인 단어를 써서 말했다. 약이 오르면 무슨 말인가 뱉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소린 지는 모르지만 불한당한테 당할 수도 있는 일이야. 자기 의사에 반하는 일을 당할 수도 있는 것 아니야? 세상에는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은하는 아무한테나 다리를 벌리는 그런 천박한 여자가 아니야.”
고문직은 열을 올리면서 약간 이성을 잃은 듯 했다.

“어쨌든 여관까지 함께 가고 한방 안에 들어가고 두 사람이 거기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 같아요. 제가 알아보았거든요.”
“뭣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일을 캐고 다녀? 뭐 조은하 선생 매장시킬 일 있어요?”
고문직이 워낙 큰 소리로 화를 내는 바람에 나봉주는 입을 다물었다.
                    
49.지하실의 성고문

“빨리 무슨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들 요구대로 모두 사퇴를 하든지...”
비상 국무회의가 다시 열리자 김휘수 재무장관이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좀체 흥분하지 않는 그도 신경이 곤두 선 것 같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요? 이제 와서 내각 총사퇴라니?”
정일만 육군 장관이 맞 고함을 질렀다.
“좌우간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 마누라가 희생되었다고 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박인덕 공보부 장관이 말을 하다가 주춤했다. 아내 얘기를 하자니까 목이 메었는지도 모른다.

“외신들이 눈치를 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아침 AFP 보도를 보면 우리 정부에 모종의 비상사태가 생긴 징조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쿠데타의 징조인지, 북쪽과의 긴장 관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꾸 캐기 시작하면 머지않아 문제가 노출됩니다.”

박인덕 장관이 평소와는 달리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우리 집 아이들을 속이는 것도 이제 한계에 왔어. 엄마가 어디 가서 여태 오지 않느냐고 아우성인데 거짓말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고일수 법무장관도 한마디 했다.

“누가 해결하는 길을 두고 우물쭈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소. 그렇지 않아도 민독추 놈들은 제3의 희생자를 내겠다고 계속 협박을 해오고 있습니다.”
김교중 총리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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