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얘기해 봤자 소득이 없을 것 같아 그대로 물러나왔다. 그 길로 곧장 클럽을 찾아갔다. 거기서 그날 허 사장을 보았다는 젊은 종업원을 만났다. 
남자 손님 잔심부름이나 해주고 때로는 때밀이도 하는 그런 젊은이였다.
“그날 허 사장님은 사우나탕에서 약 30분쯤 있다가 9시 40분께 나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시간을 잘 기억하지?”

“벌써 형사 나리들이 와서 몇 번이나 물어보고 조사해 간 건데요. 그날 허 사장님이 사우나탕 안에서 저를 부르기에 뛰어갔더니 수건 한 장을 가지고 오라고 하더군요. 허 사장님은 꼭 30분씩 땀을 빼거든요.”

“그때 30분 됐단 것은 어떻게 알았어?”
“예, 바로 저겁니다."
젊은이가 옆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를 모양으로 생긴 모래시계였다. 유리로 만든 삼각형 통이 양쪽에 붙고 허리가 잘록한 모래시계. 위쪽 유리통 속의 모래가 아래의 유리통 속으로 조금씩 흘러내리게 돼 있는 것이다.

“이 모래가 위에서 아래로 다 흐르면 꼭 30분이지요. 제가 허 사장한테 갔을 때 위 모래가 거의 다 흐르고 일이 분 걸릴 정도로 조금 남아 있었지요.”
“그걸 본 사람은 자네와 허 사장 두 사람뿐이란 말이지?”
“아뇨. 저 자동차 서비스 김 사장도 마침 그때 들어왔지요.”
“허 사장이 처음 이 헬스클럽에 들어오는 것은 보았나?”
“아뇨. 텔레비전 생방송 보느라고 허 모래시계를 보면 30분쯤 전에 왔다는 게 틀림없죠.”

젊은이는 모래시계를 엎었다 세웠다 하면서 설명했다.
나는 여기서도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하고 돌아섰다. 허 사장이 사건이 난 15분 후에 현장에 왔으니까 30분 동안 사우나탕에 있었다면 완전한 알리바이가 성립된다.
  다음날 나는 임시 수사 본부로 갔다.
  임시 수사 본부의 좁은 실내엔 의외의 광경이 벌어졌다. 책상 위 여기저기에 고무나무며, 진달래며, 풍란이며 여러 가지 화분이 잔뜩 얹혀 있었다.

“아니, 범인이라도 잡았나요? 이게 웬 축하 화분들입니까?”
빙긋이 웃었다. 빙긋이 웃는데도 그의 주름투성이 눈살이 그 큰 눈을 감추며 함박 웃는 것 같았다.
“화분들한테 좀 물어 봤지만 범인은 모른다고 입을 딱 다무는군요.”

이 화분들은 박윤준 사장, 허벽 사장 김형자 공장장의 아파트서 가져온 것들인데, 범행에 사용된 고무나무 화분과 유사한 점이 없나를 며칠 동안 감정했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화분 그릇의 유사점, 화분에 사용된 밑거름의분석 등을 해봤으나 깨진 화분이 어느 집 것이란 것을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흉기로 사용된 화분과 같은 것을 만들어 아파트의 여러 사람에게 보였으나 아무도 그것이 뉘집 화분이라고 말핳지 않았다.
“말하자면 화분 몽타즈를 만들어 수배를 한 셈이군요.”
“그게 그렇게 되나? 허허허. 경찰질 이십 년에 화분 지명 수배란 말은 처음 듣는군. 허허허.......” 

추 경감은 오랜만에 너털웃음을 웃는 것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화분들 틈에 비디오(VTR) 한 대와 컬러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아니, 경찰서에 이건 또 뭡니까? 문화 영화라도 보셨나요?”
내가 묻자 추 경감은 비디오의 플레이 스위치를 눌렀다. 화면에는 곧 이산가족찾기 프로가 흘러나왔다.
“이건 또 왜요?”

“사건 날 밤 8시 50분부터 9시 50분까지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프로가 녹화되어 있습니다.”
“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녹화를 했습니까?”
“허 사장이죠.”

“그럼?” 
“뭐 이상하게 생각지 말아요. 허 사장이 자동 타이머로 녹화한 것이니까. 허 사장은 배순실이 생방송으로 나올 테니까 그걸 녹화해 두고 싶었겠지. 자동 타이머 장치를 8시 50분부터 9시 50분까지 녹화하게 해놓고 헬스 클럽에 갔으니까요.”
추 경감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동 타이머?”
“임 기자 집에 비디오 없나?”
“저 같은 박봉 기자가 무슨.......”

“허허허. 요즘은 기자 봉급이 우리 공무원보다 훨씬 낫다던데요. 비디오란 사람이 꼭 조작하고 지켜 있지 않아도 시간과 채널만 맞춰 놓으면 필요한 시간에 자동으로 다 녹화가 된다구요.”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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