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코라도 안 나는 냄새야 맡을 수 있어요?”
“추 경감의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범인을 내놓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만 좀.......”

“또 슬슬 취재 솜씨가 나오는군. 그래 궁금한 게 뭐요?”
역시 맘씨 좋은 추 경감이다. 아는 대로 다 대겠다는 투다.
“거 508호실 사는 박윤준 사장말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추 경감은 손을
“그 박 사장이 봉제공장 배순실한테 지불할 돈이 있는 건 틀림없어요.”
“예? 지불할 돈이라고요?”

“아직 그것은 취잴 못했소? 배 사장의 인형을 갖다 수출하는데 지불할 돈이 없겠습니까? 2천 6백만 원을 이달 말까지 청산하기로 돼 있더군요. 허지만 헛수고입니다. 박 사장은 사건 시간에 자기 방에서 텔레비전으로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보며 눈물을 짜고 있었으니깐요. 함께 텔레비전을 본 사람은 아내, 두 아들 그리고 자기 차의 운전사 모두 다섯 사람이나 되니까요.”

추 경감은 아예 그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는 투였다.
“그럼 꼭대기 층의 공장장 “아 그 못생긴 생과부 말이군요. 그 여편네도 그 시간에 신길동 봉제공장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증인은 있습니까?”

“혼자 텔레비전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나요. 그가 있었다는 현장도 다 봤습니다만.......”
추 경감은 이 대목에서 별로 자신이 없다는 투다.
“남편인 허벽 씨가 사건 직후 십여 분 만에 현장에 왔다는 것이 처음부터 걸립니다. 그건 좀 캐보셨나요?”

나는 슬금슬금 걸어가며 추 경감이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도표를 슬쩍 보았다. 그것은 타임 테이블 같은 것이었다. 배순실 사장이 저녁 8시 10분 스튜디오에 도착, 거기서 약 40분 머문 뒤 9시 28분 아파트에 도착, 차에서 내리다 피살된 걸로 되어 있었다.

“허벽 사장이 헬스 클럽에 간 것이 사실이냐, 시간을 따져 봤느냐 그거겠죠? 물론이죠. 허 사장은 8시 40분까지 아파트 자기 방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아파트서 내려와 헬스 클럽에 가서 약 30분 동안 사우나를 하고 막 나오다가 아내가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다 확인되었지요.”
나는 경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 배순실의 그날 행적, 즉 타임 테이블을 머리 속에서 굴리고 있었다.

“배순실이 여의도 방송국엔 무엇하러 갔습니까? 더구나 밤중에......” 지가 무슨 내가 눈웃음으로 머금은 채 경감을 빤히 쳐다보았다. 추 경감은 자기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한테는 약했다.
“그것도 아직 모르셨수? 쯧쯧. 그럼 배순실이 이산가족이란 건 아시오?”
그때서야 내 머리에 번뜩 스치는 게 있었다.

“그럼 배순실이 피난 때 잃어버린 그 여동생을 만났나요?”
“그렇지. 바로 그거요. 방송국에 동생을 찾아 달라고 신청해 놨는데 그때 동생이 나타났다는 거요. 남편 허벽과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동생이 방송국 스튜디오에 나와 있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고 배순실은 허둥지둥 8시 45분께 차를 몰고 여의도로 간 거지요.”

“즐거운 날, 오매불망하던 동생을 찾았는데 이번엔 자기가 목숨을 잃다니.......”
“다 운명의 장난이지요. 난 배순실이 그 여동생과 만나는 장면을 경찰국 상담실에서 텔레비전으로 보았는데 참으로 감격적이던데요. 두 자매가 어떻게 통곡을 하던지.......”
“그럼 그 장면이 생방송 되었습니까?”

“물론이죠. 그녀의 남편은 물론 우리 사천만 민족이 다 보고 맘속으로 박수를 쳤을 겁니다.”
추 경감은 자기 일이나 된 것처럼 우쭐해 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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